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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20 화) 한소무제 유총의 죽음
 
이순복   기사입력  2016/04/18 [10:49]

 유총(劉聰,AD? ~ 318년, 재위: 310년 ~ 318년)은 오호십육국시대 전조의 3대 황제이다. 묘호는 열종(烈宗)이고 시호는 소무황제(昭武皇帝)이다.
 앞에서도 이야기 되었으나 유연(劉淵)의 아들로 태어나 유연의 휘하에서 주로 낙양(洛陽)성을 공략하는 전투를 담당하였다. AD310년 유연이 죽고 장남 유화(劉和)에게 제위가 돌아가려하자 이를 용인하지 않고 찬탈에 가까운 일을 꾸몄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유화는 강력한 군권을 가진 유총에게 밀려 망명의 신세가 되어 죽었다. 유총은 속말로 모반을 일으켜 유화를 쳐버리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황제가 된 유총은 석륵(石勒), 왕미(王彌)를 파견하여 화북 일대를 초토화시켜 낙양을 고립시키는 전략을 취하는 한편 유요(劉曜), 호연안(呼延晏) 등에게 낙양을 직접 압박하게 하였다.
 그가 쓴 작전은 주효하여 AD311년 4월에 유총은 서진(西晉)의 수도 낙양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서진의 회제를 사로잡았다. 이 사건을 영가의 난(永嘉之亂)이라 부른다. 낙양을 함락시킨 이후 유총은 유요에게 장안(長安)에 세워진 서진 민제(愍帝)의 임시정부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리고 석륵 왕미 등은 화북 일대를 정복하였다. 유총은 그토록 화려하게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였으나 낙양 함락 이후 점차 주색에 빠져 폭정을 일삼았으며 환관이 득세하는 황실을 만들고 말았다. AD312년에는 포로로 끌고 온 서진 회제에게 갖은 모욕을 주다가 살해하였으며 AD316년에 장안이 함락되고 민제가 포로로 끌려오자 다시 민제를 모욕하다가 AD317년에 살해하였다. 그 뒤 유총은 AD318년에 병사하였다.
 이러한 유총이 임종이 가까워지는 과정을 자세히 따라가 보자. 한황제 유총은 태자 유약이 옥간(玉簡)을 가죽주머니에 담아온 꿈을 꾼 후부터 정사를 살피지 않았다. 하늘이 유씨에게 준 왕좌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는 운명론적인 발상에서 정사를 멀리하고 허랑 방탕의 길로 들어섰던 것이다. 그 길은 음주가무와 음란과 향락 그리고 간음까지 난무한 무법천지의 세상이었다. 그러므로  밤이 되면 궁중이 연회장으로 변하고 계집들의 간드러진 교성이 풍악소리와 함께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소리는 바람을 타고 구중궁궐 높은 담장을 넘어 여념 집으로 흘러갔고 불야성을 이룬 휘황찬란한 등명은 별과 달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이런 나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 태자 유약이 갑자기 풀잎의 이슬처럼 죽어 버렸다. 한황제 유총은 태자를 잃어버리자 허무와 염증을 느끼고 자포자기식으로 세상만사를 외면해 버리니 정사와는 더욱 더 멀어졌다. 그러다가 얼마 되지 않아 한황제도 원인 모를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유약 태자가 죽고 1년이 되던 어느 날 저녁 때 시름시름 앓으며 침상에 누워 있는 한황제 앞에 유약이 나타났다. 그는 아들을 반가움과 놀라움이 엇갈린 감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맞았으나 유약은 가만히 손을 저으며 말하기를
 “아바마마, 이제 저와 함께 떠날 시간입니다. 준비는 되셨는지요? 소자가 아바마마를 모셔가고자 법가(法駕)가 마련되었고 저승사자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나이다.”
 “오호 태자야, 네가 간지도 벌써 1년이 지났구나. 그래, 따라 가자 하니 따라가야지. 내 어찌 운명을 벗어나 살 수 있겠느냐.”
 한황제는 아들 유령에게 그리 말하고 정신을 수습하여 유요와 석늑을 불러오라 명했다. 두 사람에게 고명을 내리고자 하였으나 두 사람은 자기를 해칠까 두려워하며 다른 일을 빙자하여 입궐하지 않았다. 이에 한황제는 조서를 내려 유요를 일자왕에 봉하고 관서도독을 삼아 81군의 군사를 거느리게 했고 석늑은 양국공에 봉한 다음 관북도독을 삼고 51군의 군사를 맡겼다. 또한 두 사람을 각각 정토대장군을 겸임케 했다. 그리고 그의 아우 상락왕 유경과 제북왕 유기에게는 상서사에 대사도를 더했으며 근준은 보국공 좌승상 그 아들 근술과 근명에게는 각각 대사마 대사구의 벼슬을 내려 좌우근위의 병마를 맡아보게 했다. 이로써 근씨 3부자는 국가의 중요한 직책을 맡고 문무 대권을 잡았기에 마음껏 조정을 출입하게 되었다.
 한황제는 병이 위독해지자 태자 유찬과 근준 유경 유기 유광원과 여러 중신을 불러 들여 후사를 부탁하고 특히 근준에게 말하기를
 “짐과 경이 함께 정사를 맡아 본지 20년이 되오. 이제 헤어지니 무슨 한이 있겠소만 경은 국구이니 태자를 잘 보필해 주오.”
 “폐하께서는 마음을 너그럽게 가지시어 용체를 보존하옵소서. 신은 목숨을 바쳐 충성하고 온힘을 다 쏟아 태자를 보좌하겠사오니 성려를 거두시옵소서.”
 한황제는 유경 유광원과 여러 중신을 보고 분부하기를
 “짐의 몸은 이미 다하였소. 태자를 경들에게 부탁하오니 충성을 다하여 종사를 지키도록 하오.”
 중신들은 모두 부복하여 이마로 땅을 치며 일제히 아뢰기를
 “어찌 신들이 자기 몸만 생각하여 충성을 다하지 않겠나이까. 죽음으로써 분부를 받들겠나이다.”
 그제 서야 유총은 머리를 돌려 모인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하기를
 “지금 천하는 매우 안정된 상태에 있으니 유요와 석늑은 변방을 지키게 하고 조정의 대신들은 그 재주에 따라서 적재적소의 일을 맡기되 함부로 군사를 움직이지 말도록 하라.”
 한황제 유총은 말을 다하고 나서 내일 다시 들어와 남은 말을 하자고 말하였으나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하고 붕어하였다. 한황제 유총은 재위한 지 9년으로 소무황제라 시호를 올렸다.
 다음날 문무백관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황제의 붕어를 슬퍼했다. 거애발상을 의논할 때 근준이 말하기를
 “국가에는 하루라도 임금의 자리를 비울 수 없는 법이니 우선 대위를 바로 잡은 연 후에 발상을 의논하십시다.”
 이에 여러 문무관원들이 태자 유찬을 받들어 즉위시키고 연호를 창원 원년으로 개원했다. 그리고 선제 유총의 유명을 따라서 질서를 바로 잡고 법례를 제정하고 대사령을 나라 안에 내려 죄인을 풀어주고 부음을 장안 양국 청주 3대진에 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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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04/18 [10:49]   ⓒ 대전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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