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부가 어려움에 처하자 돈만은 앞뒤를 헤아리지 않고 일처리를 하겠다고 나섰다. 이런 끈끈한 돈만의 의리 앞에 고공은 감격할 따름이었다. 의지가지가 없이 크게 흔들리던 고공의 마음에 돈만은 크게 의지가 되었다. 그래서 모든 미사여구를 생략하고 말하기를
“그리해 주시면... 그리해 주시면...”
고공은 말끝을 맺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송씨부인도 그 때서야 비로소 내막을 알고 소리 죽여 울었다. 갑자기 온 집안이 삭막한 찬바람이 일었다.
사람의 흥망을 누가 알리요. 국사의 흥망을 평하여 외적에 기인하지 않고, 내적에 기인한다지만, 한 인간. 한 인생의 흥망은 무엇으로 가늠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튼 보이지 않는 운명의 손이 희롱하고 있는 듯 했다.
고공은 오른 주먹을 힘차게 쥐었다. 그리고 신불을 찾는 마음이 되었다.
‘내가 악인입니까? 내가 무슨 업을 타고났기에 이렇습니까? 내가 선하지 못합니까? 나를 시험하는 겁입니까? 아니오. 아니 됩니다. 나는 넘어질 수가 없습니다.’
고공은 돈만과 호성을 일본으로 떠나보내고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심신이 불편하여 구들장을 짊어지고 말았다. 송씨부인은 시아버님의 영전에서 기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가하면 장독대에 마련한 삼신할미당에 정화수를 떠놓고 열심히 기도했다. 이런 일은 점화가 비명에 간 후로 시작된 신불을 향한 염원이었다. 오늘 새벽에게도 찬물로 목욕하고 정화수를 떠놓았다. 삼신할미께 기도하기 위해서다. 이럴 적마다 점화 생각이 간절했다. 이런 모든 일을 점화는 뒷탈없이 해 주었지 않았던가. 둥구나무가 불탄 후부터, 큰 짐승, 업이 사라진 후로, 이런 사단이 일어난다고 생각을 하니 더욱 점화의 생각이 간절했다.
‘용한 사람, 참말로 용한 사람이 었는디.’
송씨부인은 막내가 태어났던 때를 생각했다. 반점을 없앤 점화가 그리웠다. 세월이 흘러 9년, 막내딸 효순이 10살이 되었다.
‘이 사람아! 자네가 구해 준 효순이가 벌써 학교를 다닌다네. 공부도 선묘 마냥 잘한다네. 참, 자네는 잘 알고 있것제. 선묘가 일본서도 1등이란 걸. 이 무정한 사람아! 말 한마디 없이 그렇게 떠나다니... 자네가 떠난 후 너무나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네. 자네가 아직도 내 곁에 있었다면 이런 어려움은 겪지 않아도 됐겠지. 이 사람아!’
송씨부인은 삼신할미에게 빈다고 정화수를 떠올리고 앉아서 점화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가하면 안사랑에서 두문불출, 누워만 있는 고공도 마찬가지였다. 점화가 죽은 후로 자신이 하는 일들이 모두 자충수를 놓고 있다고 생각을 하니, 한낱 아녀자에 불과한 무당 점화가 크나큰 거목으로만 느껴졌던 것이다.
‘점화! 내게 말해 줘. 옛날 그 때처럼 나에게 찾아와서 말해 줘. 아니 된다고. 혹은 잘한 일이라고 말해 줘. 나는 시방 죽을 지경이라고. 자네는 잘 알고 있겠지. 보라고, 나는 마을 사람들에게 땅도 나눠줬네. 최익손이 그 놈도 찾게 했어. 모든 재산을 돌려 주려고. 그뿐 아니야. 굴개 방축도 막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려고 그래. 잘 한 일이지. 참 잘한 일이지. 그런데 말이야.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아버님이 그렇게 돌아가시고... 굴개 방축도 마음대로 되지 않아. 안 된단 말이야. 영파쟁이 공사보다 더 많은 돈을 쳐 넣어야 방축이 막아 질 것 같아. 나는 그래도 막을 거야. 막아서 배고프고 굶주린 사람들의 배를 채워 줄 거라고... 그런데 이게 뭐야. 사건이 터졌어. 잘 못 하면 단 하나 뿐인 아들을 잃게 생겼어. 아들을... 내 아들을 잃게 생겼다고. 아냐. 그 놈 보다 내가 먼저 죽을 지도 몰라. 내가 내 몸을 내 맘대로 못 하겠단 말이야. 점화! 이승과 저승이 멀다고 하지만 나 좀 살려 줘. 나를 살려 줘.’
고공은 절통한 마음으로 점화를 그리워하며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풀어놓았다.
용부를 보려고 일본에 간 돈만과 호성은 우선 알음을 대어 경찰서를 찾아갔다. 다행히도 용부는 별탈없이 유치장에서 갇혀 있었다. 변호사를 대고, 유력 인사를 만나고, 결국 오야붕과 대좌했다. 그런 과정에서 호성은 이곳에서도 그 성정을 이기지 못하고 굴레 벗은 망아지 마냥 날 뛸 때가 많았다.
“형님! 돈만이 형님! 콱 즈그 죽고 나 죽고 맞대 불라요.”
단 둘이 되면 그렇게 소리 지르고 기고만장이었다.
“이 사람아! 여기는 조선이 아니여. 무서운 적국이여. 야쿠자들과 싸우는 전쟁이라고... 알기나 해. 야쿠자는 사무라이 후예라고. 왜놈 풍신수길이 길러 놓은 사무라이 후예야. 저 것들이 조선을 삼키고, 국모를 시해하고, 동양을 짓밟고, 시방 세계를 집어 삼키려고 벼루고 있는 사무라이 집단이여. 잘 못 걸리면 뼈도 못 추려. 들었제. 재산 손실도 크지만 자그만치 사람이 일곱 명이나 불에 타 죽었어. 제발 진정 혀. 이렇게 날 뛸 테면 본국으로 돌아가. 차라리 내 혼자 일을 처리할 텐께.”
돈만은 호성을 뜨끔하게 나무랬다. 그러나 그것이 호성을 진정 시키기에는 부족했다. 호성은 틈만 나면 만취가 되어 객기를 부렸다. 그런 가운데 송씨부인이 용부의 옥바라지를 하겠다고 막내딸 효순을 데리고 왔다.
“아이고, 사부인 마님께서... 너무 걱정 마십시오. 돈이 죽제, 사람이야 어떨려고요.”
돈만은 양손을 비비며 겸손하게 정황을 설명했다.
“형수님은 효순이 까지 데리고 이 놈으 적국을 뭣 하려고 오셨소.”
호성은 대뜸 큰 소리로 말했다.
“숙부님! 소리를 낮춰요. 남들 듣소.”
송씨부인은 가슴을 조이며 말하고 손을 내어 저었다.
“걱정 마십시오. 쪽발이들은 못 알아듣소. 여기 조선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면 더 좋아 하니...”
돈만이 송씨부인을 안심시켜 말했다.
호성의 한바탕 호들갑을 떨던 큰 소리에 얼굴까지 새파래지던 송씨부인이 호성의 또 다른 설명을 듣고 다소 마음이 누그러지며 안정을 되찾고 말하기를
“누가 있고 또 있겠소. 하나뿐인 아들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옥바라지나 하려고 왔어요. 집안 어른 말씀이 선묘 혼자 외로우니, 효순이를 데려가라 했소. 학교도 여기서 보내고, 어미 통역도 하라했습니다.”
송씨부인이 이와 같이 자상하게 설명하자
“잘 했습니다. 참으로 잘 하셨습니다. 아무리 여기서 일을 잘 처리한다 해도 재판이 끝나고, 형 집행을 받아, 조선으로 용부를 송치하려면, 넉넉잡아 일 년은 걸릴 것이요. 사부인마님께서 왜말이 서투시는데 효순이 있으면 낫겠고, 선묘도 효순 아가씨랑 함께 있으면 힘이 될 거요.”
돈만도 전적으로 찬성하여 말했다. 그러나 호성은
“아들은 저 모양이 되었는데 딸들만 벌떼처럼 성하면 뭣할 것인고... 집안이 어긋날랑께 하는 일이 모두 뒤틀리기만 하고...”
제법 사리를 가다듬어 하려는 말이었으나, 볼래 생겨먹기를 그리 생기고 보니, 듣는 이로 하여금 앙금을 남게 했다.
“이 사람아! 그리 말 하들 말아. 시방 윤심덕이나, 배정자가 일본에 건너와서 남자 열 스무 명 몫을 한다는 말도 못 들었어.”
돈만이 나무래 듯 말했으나
“도끼로 콱 가운데를 찍어서 만든 계집이 잘 나면 얼마나 잘 났것소.”
앵도라지 듯 말하며 권련을 붙여 물고 외면하고 말았다.
“그건 그렇고, 사부인 마님! 피곤하시겠습니다만 용부 면회를 갑시다.”
돈만이 그렇게 말하고 앞장섰다.
용부는 유치장에 들어가서 오히려 건강해 보였다. 그리고 씩씩해 보였다.
“용부야! 이놈으 자석아! 어쩌다 이리 됐어?”
송씨부인은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아들의 손을 잡고 말했다.
“어머니! 걱정 말아요. 제 걱정은 말아요. 저는 이제 마음이 편합니다. 죽어도 눈을 감고 죽을 성 싶고 살아도 마음을 놓고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오빠! 나 효순이, 보고 싶었어?”
“오오라. 효순이구나. 많이도 컸고 예쁘게 자랐구나. 공부도 잘 하고...”
용부는 그렇게 말하고 눈물을 감추려고 애를 쓰다가 닭똥 같은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허, 이 놈으 자석아! 흐흑.”
송씨부인도 참다못해 울음을 터뜨리고 만 것이다.
“어머니, 윤심이는 잘 산데?”
용부는 고개를 떨어뜨리며 물었다.
“응, 잘 산다. 이 자석아! 윤심이는 잘 있으니 걱정 마. 늬 일이나 걱정 해. 오죽 했으면 늬가 그런 큰일을 저질렀겠냐? 이 놈으 자석아! 으흑.”
“사부인 마님! 이제 진정하시오. 이런 횡액(橫厄)이 다 훗날 좋을 라고 있는 일인 줄 알고 위안을 삼읍시다. 세상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 안 허든가요.”
돈만이 위로해 말했다. 면회 시간이 끝나자 송씨부인은 통곡을 금치 못했다. 천지가 무너질 것 같았으리라. 금지옥엽, 외아들을 철창 속에 두고 나오는 어미의 심정이 오즉 하겠는가 말이다. 이런 것을 횡액이라 할 것이다.
그렇다. 뜻밖에 찾아 온 횡액 이었다. 횡액 이란 횡래지액(橫來之厄)을 줄여서 하는 말이다. 예상치 못하게 뜻밖에 찾아온 재액을 말한다. 인간은 이런 위기 상황에서, 확실한 피해를 입은 현실에서, 좌절하지 않고 내일이라는 미래를 기대하는 슬기의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이럴 때 인간만사 새옹지마라는 말로써 위로를 받는다. 새옹지마(塞翁之馬)란 회남자 인간훈에 나오는 옛날이야기다. 새옹이 기르는 말이 도망치고 혹은 준마를 이끌고 오기도 하는데, 그의 아들이 말을 타다가 떨어져 절름발이가 되었다. 아들은 병신이 되었기에 전쟁이 나자 뽑혀가지 못했다. 그후 전쟁에 나간 사람은 목숨을 잃었으나, 새옹의 아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생긴 말이다. 세상의 모든 이치는 돌고 도는 것.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마음을 갖자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새옹을 두고 새옹화복(塞翁禍福)이니, 새옹득실(塞翁得失)이란 말도 생겨났다.
송씨부인을 위시한 세 사람이 면회를 마치고 돌아오니 선묘는 집안을 깨끗이 청소해 두고 공부를 하다가 뛰어 나오며
“어머니! 어머니. 오셨어요.”
곱게 인사를 하고 눈물을 흘렸다. 설음이 복 바쳐 운 것이다. 송씨부인과 함께 산 기억이 아련하건만 스스럼없이 친딸과 다름없는 행동을 보인 선묘였다. 송씨부인은 윤심의 처녀시절과 꼭 같다는 생각을 하며 부둥켜안고
“아가, 객지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냐? 오빠 땜세 늬가 고생이 얼마나 많았어.”
크게 치사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 집은 고대광실(高臺廣室) 거대한 집은 아니지만, 이 부근에서는 좋은 집이었다. 선묘를 보내던 해에 고공은 이 집을 마련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