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저리 비켜, 좁아. 저리 비켜!”
좁은 장바구니 속에서 자리를 차지하려고 과일들이 싸우고 있습니다.
사과, 대추, 밤, 배에 바나나, 파인애플..
어머니가 과일을 담을 때마다 바구니가 좁아지면서 서로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저리 비켜, 감히 내 위에 앉으려고 해? 어서 가!”
작은 대추가 비집고 들어오는 바나나에게 비키라고 소리칩니다.
팔뚝처럼 큰 바나나는 손가락만도 못한 대추가 비키라고 소리를 치자 어이가 없다는 듯이,
“네가 뭔데...좁으면 네가 가면 되잖아!...”
지지않고 맞받아칩니다.
그랬더니, 옆에 앉은 감이 눈을 부라리며,
“이 녀석이... 어디서 큰소리야. 저리로 가! 맨 끝자리로...”
배도 덩달아 야단을 칩니다.
“이 바나나가 버릇없이... 저리가. 감히 어디서 대추에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과일들이 모두 자기를 보고 비키라는 서슬에 바나나는 움찔하며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에헴.. 감히 어디서...에헴...”
대추는 보란 듯이 여러 과일들을 굽어보며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눈을 감았습니다. 모두들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2.
시장에서 사 온 과일들은 장바구니에서 나와 부엌에서 어머니에게 깨끗이 씻겨졌습니다. 바나나와 파인애플은 빠졌습니다.
어떤 과일은 씻겨 질 뿐만 아니라 껍질도 정성껏 깎였습니다.
사과, 배, 단감이 그랬습니다. 곱게 단장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나나는 한 귀퉁이에서 이런 것을 못마땅하게 바라보았습니다.
이때 어린 준영이가 다가와 바나나를 보자 달라고 졸랐습니다. 바나나는 준영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입니다. 엄마는 바나나를 얼른 떼어 준영이 손에 쥐어주었습니다. 준영이는 맛있게 바나나를 먹고 나서, 이번에는 대추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엄마는,“안 돼, 대추는 먹으면 안 돼. 차례상에 올릴 거란다...”
하면서 한사코 달라는 준영이에게 대추를 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대추는 이런 모습을 보고,
“어흠...”
하면서 여전히 눈을 감고 양반다리를 틀고 앉아 있었습니다.
‘대추는 귀하고 비싼 과일인가 보다.’
바나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영문을 알 수는 없었습니다.
대추가 높은 어른인 양 느껴졌습니다. 사과, 밤, 감, 배도 대추를 보면 고개를 숙이고 우러르는 것을 보고는 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안 넓은 거실에 온 가족과 친척들이 모였습니다.
오늘은 여기저기서 온 가족들이 모여 반가운 인사를 나누며 맛있는 음식을 먹는 민족의 명절 추석날입니다.
며칠 전부터 어머니는 시장에 가서 고기, 과일, 생선, 나물 등을 사서, 굽고 지지고 부치고 갖은 요리를 만들어 오늘을 준비하였습니다.
대추, 바나나, 파인애플, 복숭아등 과일들도 그날 장마구니에 담겨 온 것이었습니다.
거실의 분위기가 숙연해졌습니다.
어르신 한 분이 나와, 경건하게 차례상을 차리는 것이었습니다. 밥(메), 고기, 나물, 생선, 과일등이 하나하나 어르신 말씀대로 상에 올려 졌습니다. 집안사람들은 조용히 어르신이 차리는 상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소리를 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과일을 놓는 차례가 되었습니다.
과일은 대추가 맨 앞에 놓여지고, 밤, 감, 배 순서로 놓였습니다.
상에 차려질 때까지 아이들은 대추나 밤 같은 과일은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엄마는 보채는 아이들에게 바나나나 파인애플을 주었습니다.
어르신은 차례상을 차리고 나서 상 위를 죽 둘러보셨습니다.
“음... 대추, 밤, 감, 배. 순서 틀리지 않았지. 잘 되었다. 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부엌 뒷전에서 이 광경을 보던 바나나가 파인애플에게 소리를 죽여 물어보았습니다.
“지금, 뭐 하는 거니?”
“쉿... 조용히. 지금 차례상을 차리잖니...”
“차례상이 뭔데?”
“명절 날 조상님들에게 감사드리고 행복하게 해달라고 절을 올릴 때 드리는 음식 상이야... 제일 맛있고 귀한 음식을 차려서 조상님들께 드리는 거야. 그러니까 경건하게 가만히 있어. 조용히 해...”
하였습니다. 바나나는 이 말을 듣고,
“으음...그럼, 우리는 뭐야? 우리는 귀한 과일이 아니야? 상에도 못 올라가고?..”
하고 물었습니다. 파인애플은,
“그런 건 나도 몰라. 하여튼 차례상에 올라가는 과일은 정해져 있고 순서가 있어. 대추, 밤, 감, 배 이런 식으로...우리는 아니야.”
바나나는 섭섭했습니다.
옆을 돌아보니 상에 못 올라가는 과일이 바나나뿐이 아니었습니다. 파인애플, 포도, 복숭아, 딸기 등 먹음직스런 음식이 뒷전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과는 오늘은 올라가려나 하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어르신이 사과를 찾았습니다.
“야호...”
사과는 환호성을 지르며 차례상 맨 끝자리에 자리를 잡고 올라갔습니다.
다른 과일들은 차례상에서 귀한 대접을 받는 과일이 부럽기도 하고 질투도 났습니다.
어르신이 주재하는 가운데 차례가 끝났습니다.
그제서야 가족들은 음식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대추, 밤 같은 과일들이 가족들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인기는 바나나나 파인애플, 딸기, 복숭아 같은 달콤하고 먹음직스런 과일들이 더 높았습니다.
차례를 지낸 후 바나나는 과일들이 모인 가운데 물었습니다.
“얘들아. 왜 차례상에는 대추, 밤, 감, 배만 올라가고 우리는 못 올라가는 거니?
혹시 아는 과일 없니?”
하고 물었습니다. 모두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막 차례상에서 내려 온 감이 밤의 눈치를 보면서 말했습니다.
“형님이 설명해주시구려...”
‘허어. 배가 있는데. 내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배는 감과 밤과 대추의 눈치를 보면서,
“참, 무식한 녀석들 이로고……. 대추, 밤, 감이 계시는 자리에서……. 감히 그런 걸 여쭈다니…….”
하면서 혀를 끌끌 찼습니다.
이때, 작은 대추가 낮은 소리로 말했습니다.
“배, 자네가 설명해주게…무식한 것들이 몰라서 저러는 것이….쯧쯧..”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자, 배는
“예, 알겠습니다. 음,음...어흠...
잘 듣거라. 왜 차례상에 대추, 밤, 감, 배 순서로 올라가는가 하면...
대추는 씨가 하나밖에 없으니 왕을 뜻하는 것이니라...
그리고 밤은 밤송이부터 껍질이 세 개 아니냐? 그러니 영의정, 우의정, 좌의정 삼 정승을 말하느니라...
감은 씨가 여섯이니, 육판서를 뜻하고, 배는 씨가 여덟 개이니 팔도 관찰사이니라...얼마나 높으신 지체들이시냐. 그러니 차례상에 올라가는 것이고, 이 벼슬 순서에 어긋나면 안 되는 법이니라...알겠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제서야 과일들은 차례상에 올라가는 과일들의 연유를 깨달았습니다.
“오, 그렇게 깊은 뜻이....”
‘그러니 대추가 그렇게 오만하게 고개를 세워도 아무 말도 못하는 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바나나의 머리를 스쳤습니다. 그러면서,
“사과는?”
하는 의문이 솟았습니다. 그러자 배는
“사과는 색깔이 붉어서 맨 오른쪽에 놓는 것이라. 홍동백서라. 붉은 것은 오른쪽, 하얀 것은 서쪽에 놓는 원칙이 있으니 사과는 맨 끝에 놓는 것이니라...알겠느냐?”
하면서 사과의 벼슬은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새삼 대추가 왕처럼 우러러보였습니다.
3.
차례도 끝나고 왁자지껄했던 부산한 추석날이 저물었습니다.
밤이 되자 부엌에 모인 과일들이 바구니 안에서 두런거렸습니다. 낮에 나눈 이야기를 곰씹는 것이었습니다.
“이 봐. 복숭아야. 너도 씨가 하나 아니냐? 왜 씨가 하나인데 왕은커녕 차례상에도 못 올라가니? 자두 너도 씨가 하나잖아.. 너는 왜 왕이 못돼?
씨가 하나인 과일이 대추뿐인가 뭐?...”
입을 삐쭉거리며 바나나가 입을 열었습니다. 다들 잠자코 있었습니다. 무언의 불만을 말하는 듯 했습니다. 복숭아가 수줍은 듯 말했습니다.
“....왜 그런지 나도 우리 엄마에게 물어봤는데...우리는 신선이 먹는 과일이고 신령스러운 나무여서 귀신을 몰아낸대. 그리고 우리는 생긴 것이 예쁜 엉덩이 같고, 색깔이 요염해서 바람피운다고 생각한대...그래서 우리는 차례상에 못 올라간대...”
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부끄러워했습니다. 바나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게 무슨 소리야? 귀신을 쫓는다고? 그래서 차례상에 못 올린다고? 정말 희한하구나...”
그때, 바구니 옆에 있던 사과가 말했습니다.
“근데, 조금 이상해...왜냐하면 대추도 가시가 있어 귀신을 쫓는 나무라거든...
그래서 벼락맞은 대추나무로 도장을 만들면 귀신이 못 온다고 귀한 대접을 받는데, 왜 대추는 차례상에 올려지는 거야?”
하였습니다. 멀리서 과일들의 이야기를 못 들은척하고 점잖게 앉아 있던 대추도 이 말에는 눈만 껌벅일 뿐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파인애플이 말했습니다.
“그러니? 참 이상하구나...복숭아는 신선만 먹는 과일이라 천도복숭아라 한다던데, 무릉도원이라는 말도 있고... 그러면 조상님들께 더 드려야 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도 누구도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눈만 깜박이고 있던 호두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부럼이라고, 대보름날 귀신을 쫓는다고 껍질을 깨먹는데, 그러면 우리도 귀신을 쫓을까 봐 차례상에 못 올라가는 건가?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호두를 좋아하셨는데...
참... 팥 있잖아. 팥도 귀신을 쫓는다고 섣달 그믐날 먹잖아. 그러면 조상님들은 팥죽 드리면 안 되겠네....
우와. 돌아가신 할머니는 팥죽을 정말 좋아하셨는데...”
말문이 터지고 보니 과일들에게서 여러 가지 말이 나왔습니다. 이상스러운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왜 그런지 정확히 아는 과일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바나나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이,
“얘, 얘. 그러지 말고 우리 잣나무 할아버지를 모셔오자. 할아버지는 모르는 게 없으셔. 그분에게 왜 그런지 물어보자...왜 차례상을 그렇게 차리는 건지...”
하였습니다. 모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다음 날 밤이었습니다. 찬장 속에 있던 잣이 과일 바구니 곁에 왔습니다.
“잣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지혜로우시니까 잘 아시죠? 왜 차례상에는 대추, 밤, 감, 배만 올라가야 해요? 대추가 왕이고 밤이 삼정승이니 해서 그러는 거예요? 말씀해 주세요.”
과일들은 모두 귀를 쫑긋하고 잣 할아버지에게 다가갔습니다.
잣은 빙그레 웃으며,
“너희들이 그게 궁금했구나..그래. 그것은 말이지...”
하면서 입을 열었습니다. 잣은 지식이 많았습니다. 서두르지도 않고 과일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차례상을 왜 그렇게 차리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나도 아버지에게 들었는데...그것은 말이지...”
하면서,
“대추가 왕이고, 밤이 삼정승이고, 감이 육판서고 하는 이야기는 잘못된 것 같아.
씨가 하나고 여섯 개고 해서 벼슬이 주어진다는 것도 이상스러워. 그러면 씨가 많은 수박은 졸개가 많아서 대장군인가? 파인애플이 나는 나라에서는 두리안이라고 하는 것이 과일 중의 왕이라고 하던데....그러면 두리안은 차례상에 오르면 황제 대접받아야지.... 근데 차례상에는 안 올리거든...”
모두 킥킥하고 웃었습니다.
“벼슬로 차례상에 오른다는 것은 난센스야...”
“그러면?...”
“그것보다 더 깊은 뜻이 있어.
대추가 오르는 것은, 대추는 암수가 한그루의 나무예요. 그래서 대추는 꽃이 피면 꽃마다 열매가 맺히지. 그러니 많이 열리고....그래서 차례상에 대추를 올려서 자손이 번성하라는 뜻을 담은거야…….”
모두들 대추를 바라보았습니다. 왕이라고 ‘에헴!’ 하고 으스대던 대추는 이 말에 코가 쑥 빠진 듯 먼 산만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밤 차례가 되었습니다.
“밤은 참 신기한 나무야. 밤을 심으면 뿌리가 생기고 줄기가 나와 열매가 열려도 뿌리 끝에 심은 씨앗 밤이 썩지 않고 그대로 매달려 있단다. 참 신기하지?
그래서 차례상에 밤을 올려 부모님과 조상을 잊지 말고, 다시말해 근본을 잊지 말고 분수를 지키라는 뜻에서 올린다는 거예요.”
“우와, 밤이? 정말이에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정말 신기하구나...”
밤은 그런 말을 듣자 목을 외로 꼬며 쑥스러워하기도, 자랑스러워하기도 했습니다.
모두들 밤을 다시 보았습니다. 삼정승 이야기는 쏙 들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감은 요?”
“감 또한 희한한 나무지.. 감은 씨앗을 심으면 그 씨앗에서 자란 나무에서는 감이 열리지 않는단다.”
“예? 그러면?”
“씨앗에서 나온 가지에서는 감이 열리지 않고, 작고 떫은 고욤이라는 열매가 열려요. 저렇게 먹음직스런 감은 절대 열리지 않지..”
“그러면? 어떻게 감을?”
“그래서 고욤나무에 감나무가지를 접붙여서 그 가지에 열리는 감을 딴단다.”
“정말? 세상에 그런 일이?”
모두들 감나무 이야기에 신기해하며 놀랐습니다.
“그것은 누구든 그대로 두면 훌륭하게 자라지 않고, 반드시 가르치고 좋은 배필을 얻어야 좋은 자손을 둘 수 있다는 가르침이 감 속에 있는 거야. 그래서 감으로 이런 교훈을 가르치는 거란다. 그리고 감은 껍질과 속이 같은 주홍색이잖아. 언제나 변함없는 성품을 가지라는 뜻도 있단다...”
과일들은 감탄하며 잣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나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비로소 대추, 밤, 감을 차례상에 올리는 이유에 납득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랬구나... 그런데 괜히 벼슬 이야기를 해가지고서는....”
잣의 이야기를 들은 대추, 밤, 감은 태도가 온순해지면서 겸손한 자세로 얌전히 앉아 있었습니다. 잣 할아버지가 계속해서 말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결혼하면 폐백이라고 신랑 집 어른들에게 신랑신부가 첫인사를 드리는데, 그 때 어르신들이 신부의 치마폭에 대추, 밤을 던져주는 거란다. 축복이지... 아이들 많이 낳아 훌륭하게 잘 키우라는 뜻이란다.
회갑잔치나 가족들의 잔치에도 대추나 밤, 감이 빠지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감이 없으면 곶감으로 하고...”
“아하. 그렇구나...”
모두들 무릎을 쳤습니다. 차례상에 놓은 과일에게 그런 깊은 뜻이 있는 줄을 미처 몰랐습니다.
이때, 언제 자기 이야기가 나오려나 기다리던 배가 참지 못하고,
“저는 요? 배는 왜 올리지요? 그리고 순서도 감보다 먼저일 때도 있고, 나중일 때도 있다던데 왜 그러죠?”
잣은 배를 물끄러미 바라다보고 빙그레 웃었습니다.
“그것은 어려워. 배...아마도 너는 집안이 좋은 덕인 것 같아. 조선시대에 왕은 이(李)씨였어요. 배를 한자로 쓰면 같은 이(梨)를 쓴단다. 그래서 이씨 왕조에서 차례상에 꼭 배를 올렸다는데, 그래서 이씨 집안은 감보다 배를 먼저 놓고, 그렇지 않은 집안은 감보다 뒤에 놓지...
조율시이, 조율이시 하는 식으로...
후후후...
남의 집 제사에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말라는 말이 이 말이야...”
모두들 덩달아 ‘하하하...’ 하고 웃었지만 왠지 씁쓸했습니다.
이때 호두가 끼어들었습니다.
“그래요. 배는 중국에서는 이별이라는 이(離)자와 발음이 같아서 절대 연인들은 배를 같이 먹지 않는대요. 그것 참 재미있네...”
하였습니다. 신기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과일들은 잣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차례상에 과일들을 올리는 이유를 알고 속이 후련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의문은 남았습니다.
바나나가 잣에게 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 차례상은 왜 올리는 음식이 정해져 있는 거예요? 누가 그렇게 정한 거예요? 저희같은 바나나를 올리면 조상님들이 혼내나요? 무식하다고?”
파인애플도 딸기도 모두 바나나의 이야기에 비상한 관심을 갖고 잣 할아버지에게 솔깃 귀를 기울였습니다. 잣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건 차례나 제사를 왜 지내는지 알면 그 답이 나와 있는 거지... 근본을 모르니 그런 의문이 드는 거야...”
“............”
“바로 조상님께 감사드리고 가족의 화목을 기원하기 위해 차례를 지내는 것이야. 그래서 가장 귀하고 좋은 음식을 정성껏 장만해야 한단다...
그렇지만, 어떤 음식을 어떻게 차려야 하는지 기준이 없으니, 옛날에 중국의 주자(朱子)라고 하는 학자가 그 방법을 가르쳤어요. 주자가례(朱子家禮)라 하여 제사지내는 법을 책으로 만든 거야.
차례상에 과일이나 고기 술등 음식을 놓는 순서를 정했지. 당연히 당시의 가장 좋은 음식을 골랐겠지...
후후.. 지금부터 거의 1000년 전의 일이야...
그 책을 고려시대에 들여와 조선시대의 차례나 결혼식 같은 의례에 적용한 건데, 당연히 우리나라와는 안 맞는 것이 많을 수밖에...
그래서 그 해석을 놓고 싸우다가 사람도 죽고 귀양도 가고 감옥도 가고 했단다...”
“그런 일 가지고 사람을 죽여요? 감옥에 가고? 정말로?”
“그때는 그게 중요하다고 보았으니까.... 어쨌든 그 예법을 함부로 하면 안 되니까 지금까지 그 법이 군말 없이 지켜지는 것이란다. 말하자면 오래된 전통이지...”
“지금부터 천 년 전의 과일과 음식으로?...”
바나나가 눈을 들어 잣을 쳐다보면서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이해가 되는군요. 바나나나 파인애플은 그 당시 없었으니까요..
딸기도 그렇고...포도? 너는 있었니?”
포도는 눈만 껌벅거렸습니다.
“아마도... 있었어도, 지금 같은 먹음직스런 포도는 아니었겠지. 산에 사는 머루 정도였겠지. 그러니 차례상에 올리기는 좀....”
“그렇군요. 아, 알겠어요. 알겠어요. 할아버지 이제 다 알겠어요...그러니 우리는 차례상에 못 올라가는 거야...천 년 전에 없었기 때문에...”
바나나는 허탈하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이 말에 파인애플이 분하다는 듯이,
“그러면, 어린 준영이는 바나나를 그렇게 좋아했는데 죽어서는 맛도 못보고 대추나 밤이나 배만 먹어야 해요? 정성스럽게 음식을 대접한다면서?...
말도 안 돼...”
“나도....나도...”
바나나, 딸기, 복숭아등 바구니에 있는 과일이 입을 모아 말했습니다.
이때 대추가 주위를 둘러보며 엄숙하게 말했습니다.
“너희들. 오해하지 마.
잣 할아버지가 말씀하셨잖아. 차례상의 과일을 벼슬이나 맛이 아니고, 가족의 화목을 뜻하는 상징으로 우리들을 올렸다는 거잖아. 그러니까 그저 맛있고 귀한 과일이라고 맥도 없이 올리면 차례상의 그 깊은 뜻이 없어지지. 그저 먹자고 올리는 잔치 상하고는 다르잖아. 오해하지 마. 우리 선조님들의 깊은 뜻을....”
이 말은 여러 과일들에게 숙연하게 들렸습니다.
잣 할아버지가 이 말을 듣고,
“대추가 역시 대추구나. 참 옳은 말이다. 차례는 그 뜻을 기리는 것이 더 중요하지. 정성으로 조상님을 모시고 가족들의 화목을 다진다는...,
대추, 밤, 감 같은 과일은 교육적으로 좋은 상징성이 있는 과일이지.
그런데 문제는....”
“문제는....”
“사람들이 그 뜻도, 정성도 모른다는 거야...정신이 없는 형식이 되고 말았다는 거지. 그저 조율시이, 홍동백서로 상 차리고 절하면 다 된 줄 알아...
그게 문제란다.”
이런 말을 하고 잣 할아버지는 떠났습니다.
4.
잣 할아버지가 떠난 뒤에도 바나나와 파인애플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잣 할아버지의 말은 옳은 말씀인데, 그렇다고 바나나와 파인애플을 차례상에 올려도 좋다는 말씀은 없었습니다. 오랜 전통상 자신들은 차례상에 올려질 수는 더욱 없었습니다. 어쩐지 억울했습니다.
시장에서는 비싸고 귀한 과일로 대접받다가 막상 조상님께 올리는 차례상에는 오르지도 못하는 천덕꾸러기가 된다는 현실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복숭아도 이유는 다르지만 마찬가지였습니다.
“귀신을 쫓는다고? 내가? 색깔이 예뻐서 안 된다고? 그렇게 나를 사랑하시던 할아버지 차례상에 올라가서는 안 된다고? 기가 막혀...”
이때였습니다. 난데없이 냉장고 안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응? 이게 무슨 소리야?”
냉장고 안에서 작게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얘들아, 나야 나. 김치야. 옆에 고추장하고 같이 있어.”
하는 것이었습니다.
“너희 과일들...오늘 좋은 이야기 하는 것 다 들었어...정말 재미있더라.
그런데 우리도 할 말이 있어...”
“너희들이? 뭔데?...”
“응. 우리도 나가서 이야기 할게...”
냉장고에서 김치와 고추장이 나왔습니다. 뜬금없는 상황에 바나나와 파인애플은 어리둥절하였습니다. 김치가 말했습니다.
“...사실은 나도 차례상에 못 올라 가. 고추장도....”
“뭐? 뭐라고? 미안하지만 너희들도 귀한 음식이 아닌 모양이구나...
비싼 불고기나 생선전처럼...”
“아니야. 아니야...사실은 예법 책에 없어서 그래...차례상 차리는 책.. 뭐라나, 주자가례? 가례집람? 뭐 그런 책에 우리가 없어서 그래...”
“너희들이 없는 건 당연하잖아. 비천해서 그런 거잖아. 그런걸 뭐....”
바나나가 매몰차게 말했습니다. 심사가 뒤틀렸던 모양입니다.
“아니라니까. 그런 책 쓸 때 우리가 세상에 없어서 그래. 우리는 임진왜란 이후에 만들어진 거야. 고추가 그때 처음 들여왔거든....그러니 그 책에는 없을 수 밖에.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 뒤 임금님 수랏상에도 올랐던 우리가 차례상에 못 올려진다는 것이 이해할 수가 없어. 김치 없이 식사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김치야말로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음식이 되었잖아. 할아버지도 우리 없이는 한 끼도 안 잡수셨어. 그런데 왜 할아버지 차례 상에는 못 올려지는 거지? 그게 너무 억울해...
너희들하고 처지가 비슷하지만, 우리는 또 달라....
우리는 한시라도 없으면 안 되는 음식이야...우리가 콩나물 무침보다도, 간장보다도 못하다는 거니? 걔네들은 올라가는데 우리는 왜 천대받아야 하지?”
“하아... 그런가? 그렇구나... 콩은 그 당시에 있었는데 고추는 없었구나. 그래서 간장은 올라가고 고추장은 못 올라가고....어머. 이건 뭐니?”
모두들 잠시 넋이 빠지는 듯 했습니다. 과일들도 충격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이때였습니다. 와인냉장고에 있는 와인이 문을 두드렸습니다.
“얘들아. 얘들아. 나도 좀 끼워 줘 봐.”
“너는 또 왜?”
“나도 할 말이 있단다.”
“무슨?....”
와인이 나와서 말했습니다. 와인은 아빠가 좋아하시는 포도주였습니다.
“차례상에 술을 올리잖아. 다들 정종을 올리더라고...전통술을 올리기도 하고...
와인은 전통술이 아니니 못 올라가는 것은 나도 이해해. 조상님들이 그 맛을 못 보셨으니까...그런데 왜 정종은 되는 거야?”
“정종이 어째서? 와인? 너도 차례상에 올라가고 싶은 거야? 지금?
우하하... 차례상에 와인을 올려? 웃긴다야. 정말...”
와인은,“너희들도 똑 같구나. 그런데 너희들이 모르는 것이 있어. 정종(正宗)은 일본 술이잖아. 그것도 일본 술의 상표이름이잖아. 천 년 전 예법 책 쓸 때 정종은 없었어. 고추보다도 늦게 들어왔어. 일제 때 들어왔으니까. 전통술도 아니고...근데 왜 김치도 안 되고 와인도 안 되는데 정종은 되는 거야?”
“...........”
와인의 당돌한 말에 모두 멍하고 쳐다만 볼 뿐 할 말이 없었습니다. 아무도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바나나는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 어리둥절해졌습니다.
전통과 예법, 정신과 정성,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문득, 바나나가 사과를 불렀습니다.
“사과야, 너는 아까 차례상에 올라갔잖아. 홍동백서라고 하면서...그게 뭐니?”
“응. 상 차릴 때 법칙이 있대. 홍동백서, 어동육서 등등...
그건 동양의 음양오행원리이고, 음식의 산지 순이래... 차례상 차리는 법에 이 원리를 적용한다는 거래.
동양에서는 청색은 동쪽, 백색은 서쪽, 붉은색은 남쪽, 흑색은 북쪽이니까, 그 방향에 음식색깔을 맞추어 놓는다는 거래. 그러니까 붉은 과일은 동쪽, 흰 과일은 서쪽이 되는 거지. 사과는 붉으니까 오른 쪽 동쪽인거야.
어동육서는, 음식재료가 나는 산지순서에 따라 놓으라는 것이래.
물고기는 동쪽, 육고기는 서쪽으로...중국에서 볼 때, 동쪽이 바다니까 물고기는 동쪽, 고기는 서쪽에 놓으라는 것이거든...”
“그게 뭐야? 그래서 어동육서야? 우리나라는 서쪽에도 바다가 있는데,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야?....”
“............”
바나나는 한참을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리고는,
“그래. 그렇군. 이제 알았다. 예법도 원칙이 있다는 걸 말이야.
차례상을 차릴 때, 음식을 산지 순으로 놓고, 음양오행의 색깔에 맞추어 놓으면 되는 거로군...맞지...그러면 질서가 생기지.
거기에 그 지방에서 나는 음식 중에서 가장 좋고 귀한 것으로 조상님이 좋아하셨을 것을 우선으로 올리라는 뜻이고. 술도 그렇고...
그러니 우리 같은 외국과일은 올라갈 상이 없다는 거네...조상님이 모르는 과일을 수입해서 올릴 수야 없겠지... 와인도 그렇고.
한데 언제까지 그래야 할까? 바나나도 귤도 파인애플도 우리나라에서 생산된다면...언제까지? 저 김치는 어떡하고?”
파인애플이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얘. 얘...됐다. 됐다. 골치 아픈 이야기 그만하자.
그러니까 차례상은 집안마다 지방마다 다른 것이니, ‘감놔라 배놔라’ 하지 말라고 했잖아. 그만하자. 알아서 하면 되지 뭘...”
“그래 맞아. 우리가 고민한다고 바뀌어 질 일은 아닌 것 같아.
그렇지만...그렇지만.... 말하고 싶어.
예법은 단지 형식이야. 중요한 것은 정성과 뜻이라는 거지.
정말 조상님이 좋아하셨고, 그리워하는 음식이라면 콜라면 어떻고 와인이면 어때? 외국에서 오래 사신 할아버지께 위스키 드리면 안 돼? 독립군 할아버지에게 정종이 웬 말이야? 할머니 상에는 김치도 놓아드리고, 팥죽도 놓아드리고....
복숭아농사로 자식 가르친 아버지 상에 왜 복숭아를 못 놓는다는 거야? 아무 근거도 없는 귀신? 그건 아니다 싶어....내 생각이야...”
어르신들에게 혼이 날까 두려웠는지 바나나는 말꼬리를 흐렸습니다.
그러나 이 말에 김치도 와인도 복숭아도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는 것 같았습니다.
“맞아, 이씨 왕조시대에는 배를 귀하게 여겼으니, 시대가 바뀐 지금 귀한 음식도 바뀔 수 있겠네...순서도 바꾸어도 좋고... 정말 그 정신과 정성을 다해서 차리면 되는 거겠네...그리고 누구도 거기에 시비를 걸어서는 안 되고...안 그래?”
“그렇다고 전통과 예법을 무시하면 안 되지. 형식과 정신을 어떻데 조화시키는가...
그게 그 집안의 가풍이겠지. 어느 집은 어머니가 당뇨병을 앓으셨는데 아이스크림을 그렇게 좋아하셨는데 못 잡수시고 돌아가셨다고, 자손들이 추석 때만 되면 아이스크림을 어머니 앞에 놓아 드린다는 거야. 마음껏 잡수시라고...
누가 그 짠한 정성에 토를 달겠어? 홍동백서를 따져가며...”
“그래. 그랬으면 좋겠다. 뜻도 모르고 정성도 없이 ‘그래야 하는 법이니라’하는 생각이 무식한 생각이네...”
“옳아. 이제 알겠네...정말 차례상은 복 받는 상이네.
김치야! 걱정하지 마. 언젠가는 너도 차례상의 가장 가운데 올라갈지 몰라. 어머니가 평생 담가서 만들어주신 그 맛있는 김치를 왜 차례상에 못 올려?
그런 집이 생길거야.. 반드시..”
모두들 표정이 밝아졌습니다. 과일과 음식들이 추석을 지내고 나서 자기들끼리 수다를 떨며 내린 결론이었습니다.